책가도
조선 시대 사대부의 방은 나무로 만든 사방탁자와 책을 읽기 위한 경상, 몇 점의 액자나 병풍, 벼루함과 재떨이 등 단출한 소품들로 꾸며졌다. 책을 읽고 시문을 논하는 문인의 방에는 더 이상의 꾸밈이 의미가 없었다. 이런 방에 걸린 족자나 병풍 속의 그림은 단연 책가도가 많았다. 조선의 르네상스라 이르는 18세기 후반, 학문을 중시한 정조가 중국의 다보각경(진귀한 물건을 모아 놓은 진열장)을 보고 규장각 화원에게 책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 보라고 한 것이 시초로 추정되는 책가도. 책가도에는 서가 안에 산더미처럼 책이 쌓여 있고, 그 책더미를 중심으로 벼루, 붓, 종이, 먹 같은 문방사우를 비롯해 선비 방의 각종 목기나 도자기, 향로 등이 등장한다. 사이사이에는 모란, 가지, 오이, 포도 등의 식물도 끼어 있다. 무엇보다도 책이 많고, 책을 중심으로 구도를 만들었기에 학문을 중요하게 여기고 숭배해 온 우리 민족의 정신이 반영된 그림이다.
책을 중심으로 문방사우와 다양한 소품을 기하학적 조형미를 살려 배치한 책가도는 마치 건축 투시도처럼 삼차원으로 보이는 것도 있고, 소품을 자유롭게 배치한 정물화 같은 것도 있다. 그림마다 학자의 서재를 표현하는 상징을 사용했는데 주로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것들이었다. 그저 구경거리가 아니라 상징을 담아 새로운 시각으로 표현한 고차원적인 그림이 책가도다.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입체적 공간을 표현하는 책가도에서 서양 미술의 원근법이 아닌 역원근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관람자가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의 사물들이 그림 밖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모양새다. 화가가 네모난 종이 안에 소품들을 배치해 짜 넣은 것이 아니라 화면 안의 어떤 힘이 사물들을 그림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결국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소품의 시선으로 짠 구성이라 볼 수 있다. 서양의 큐비즘적 회화 방식이라는 얘기도 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책가도를 자주 접하고 살았다. 원근법이나 역원근법 등을 알기 이전이었는데도 책가도를 보면서 대도시의 건물 숲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책가도 중 한 부분을 뽑아 무늬로 만들었다. 내 책가도 무늬에는 책가도의 기본 입장이라 할 역원근법이 없다. 책 무더기를 체크무늬처럼 반복적으로 사용해 어린 시절 느꼈던 건물 숲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 민화 / Folk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