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자꽃
오래전 북촌 한옥들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조용한 골목을 유지하던 때, 개축 관계로 지인의 오래된 한옥을 들여다보다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방 안의 벽지 한쪽이 찢겼는데 그 속에 여러 장의 벽지가 겹쳐 있었다. 그동안 그 집에 살아온 사람들이 덧붙인 벽지가 고스란히 그 안에 남아 있었다. 그중 노르스름한 미색 바탕의 흐릿한 사방연속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모란 무늬였다. 평범하지만 근대 문화의 자취가 남아 있어 흥미로웠다. 사방연속완자무늬에 모란이 그려진 벽지는 저렴한 재료로 만들어 내서 질감이 거친 종이 벽지였다. 그 느낌과 질감을 최대한 살려 디자인했다.
이렇게 모란을 만나면 때로는 부귀영화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라고 큼직하고 가능하면 사실적으로 디자인하기도 하고, 꽃은 최대한 누르고 잎사귀만 도드라지게 디자인하기도 한다. 때로는 윤곽만 따서 연한 배경색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동판화처럼 눌러 찍은 느낌을 내기도 한다. 횟대보의 자수 느낌을 최대한 살려서 실사로 찍기도 하고, 모란과 새가 어우러져 있는 화조도의 픽셀이 깨진 것처럼 디자인하기도 하고, 두툼한 질감을 살리려 재커드에 올려 보기도 한다. 모란에 관해서라면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많아 소재가 다양하니 디자인도 끝이 없다. 내가 디자인한 무늬 가운데 모란을 주제로 한 디자인이 가장 많은 것을 보면 상징 면에서나 조형 면에서나 모란은 무늬 디자이너에게 화수분 같은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