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꽃잎

고려의 도공들이 심산유곡에 들어가 자기만의 도자 세계에 깊이 빠져들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낙담하고, 추스르고, 다시 낙담했을까. 그 고난의 시간에 그들이 바라본 것은 하염없이 흘러가는 구름, 변함없이 사시사철을 지내는 아름드리나무들, 그리고 숲속의 크고 작은 생명체들. 그 속에서 자연의 신비에 감동하고, 끝없는 정성으로 가마에 불을 지폈을 도공들. 그리하여 분청사기란 새로운 도자기를 빚어 냈을 때의 기쁨은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심에서 한 걸음 떨어져 전원생활을 하면서 순간순간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감동할 기회가 늘어난다. 어떤 염료로도 흉내 낼 수 없는 하늘빛, 매일 사진을 찍어도 한 번도 같은 모습인 적 없는 나뭇잎들,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가도 의연히 제빛을 발하는 길가의 풀꽃들. 아무리 감동해도 지나치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자주 넋을 잃게 된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은 오래전 가마터에서 모란잎 무늬 도자기를 구워내던 조선의 도공들과 마음이 맞닿는 듯한 즐거운 착각을 이끌어 내곤 한다.

분청조화박지모란문편병에 그려진 꽃잎을 갖고 분모엽을 작업하다 보니 남은 꽃잎들이 화면에 흩어져 있었다. 그 나름대로 담백한 조형미를 보이고 있었다. 그 꽃잎 조각들을 모아 가위질하듯 오려 큼직하게 확대해서 배열했다. 마치 셀로판지와 종이를 가위로 오린 듯한 모양새였다. 육각형의 조각잇기 무늬를 아주 작게 만들어 바닥에 깔아 질감을 나타내는 문양지로 활용하고 흩어진 꽃잎들은 더러 겹쳐서 비치게 했더니 판도라의 상자처럼 계속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이 생겼다.

바탕에 이런 질감을 주는 것은 디자인적인 효과도 있지만 작업 과정상의 이유도 있다. 표면이 고운 소재의 원단에 염색을 하지 않고, 인쇄를 하면 얼룩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제가 되는 사물을 극대화하거나 극소화해서 다른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평소에 꾸준히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의 가장 좋은 선생님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다.

* 도자기 / Ceramics